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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협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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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주국 협화회는 1932년 만주국 건국 후 설립된 전인종적 기구로, 만주국의 건국 정신을 실천하고 관동군의 지도 아래 사상적, 교화적,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 '민족 협화'를 표방하며, 만주국 내 유일한 공인 정치 조직이었으나 정당은 아니었다. 협화회는 만주국 내에서 항일 세력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고, 집단 부락 건설을 통해 주민들을 통제하는 등 전체주의적 성격을 띠었다. 1940년 일본의 대정익찬회를 모방하여 조직을 개편하고, 관동군의 숙청을 거치며 동원과 감시의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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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협화회 - [정당]에 관한 문서
개요
협화회 깃발
협화회 깃발
명칭만주국 협화회
원어 명칭만주어: ᠮᠠᠨᠵᡠ ᡤᡠᡵᡠᠨ ᠰᡳᡝᡥᠣᡥᡠᡳ
중국어 간체: 满洲国协和会
중국어 정체: 滿洲國協和會
일본어: 満州国協和会 (만슈-코쿠 쿄-와카이)
로마자 표기중국어 병음: Mǎnzhōuguó Xiéhehuì
일본어: Manshū-koku Kyōwakai
정치
이념파시즘
군주제
만주 민족주의
범아시아주의
정치 성향극우
역사
창립1932년 7월
해산1945년 8월
조직
지도자아이신 교로 푸이
본부만주국 신징
기타
슬로건(제공된 문서에 슬로건 정보가 없음)

2. 결성 및 성격

만주사변 후 결성된 위충한 등의 자치지도부가 만주국 협화회의 기원이다.[6] 1932년 7월 25일 만주국 국무원 회의실에서 결성식을 갖고 출범하였으며, 만주국 전역의 전 주민을 통솔하는 전인종적 기구였다. 만주국협화회라는 명칭은 일본 제국의 협화회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만주국 협화회는 만주국의 건국 정신을 실천할 전만주의 유일한 사상적, 교화적, 정치적 실천단체로서, 관동군의 지도와 구상에 의해 설치되었다. 강령은 다음과 같다.

# 건국정신의 현양

# 민족협화의 실현

# 국민생활 향상

# 선덕달정(宣德達情)의 철저

# 국민동원 완성

만주국협화회는 만주국에서 유일하게 공인된 정치 조직체였으나, 정당은 아니었다. "협화회"라는 이름은 범아시아주의 운동이 장려한 "민족 협화"(民族協和, mínzú xiéhe)라는 개념에서 유래되었다. 도미나가 타다시는 그의 저서 《만주의 민족》(Manshū no Minzoku)에서 민족 자결에 대한 소련의 정책에 관해 광범위하게 저술했다. 민족 협화 정책은 연방주의의 목표를 달성하고 소수 민족의 권리를 보호하는 동시에, 중앙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는 정책으로 홍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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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사변 이후, 중화민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과 왕도정치에 기초한 신 국가 건설의 이념을 설파한 위충한 등의 자치지도부가 협화회의 기원이다.[6] 만주국 건국에 이르러 자치지도부는 해산되었지만, 대웅봉회 (주로 자정국으로 흘러감)의 중야호일[7], 만주청년연맹의 야마구치 시게지, 오자와 가이사쿠, 위충한의 아들 위정원, 완진탁 등이 봉천 충령탑 앞에서 ''''만주국 협화당''''을 결성했다. 군사령부의 이시와라 간지이타가키 세이시로로부터 설립 준비금 2만 엔이 출자되었고, 미야자키 마사요시의 제안에 따라 연액 120만 엔이 국고에서 지출되게 되었으며[8], 협화당이라는 명칭에 반대했던 아이신 교로 푸이의 의향도 있어 푸이를 명예 총재로 하는 만주국 협화회로 개편되었다.[9]

이시와라 간지는 푸이와 관동군을 대신하는 만주국의 "미래의 주권자"로서 협화회에 의한 일당 독재제(일국일당)를 공공연히 목표로 했다.[10] 그러나, 고이소 구니아키 등이 구 협화당의 원로들을 배제하고 관동군과 일본계 관리에 의한 "내면 지도"를 강화하여 교화 단체화를 꾀했으며[11], 아마카스 마사히코나 후루미 타다유키 등과 협화회 도쿄 사무소를 거점으로 하는 이시와라 일파의 대립으로부터 그 존재 의의는 변질되어 중일 전쟁을 계기로 국가 총동원 체제를 담당하기 시작했다[12][13][14][15][16].

협화회의 기본적인 단위는 "분회"로, 지역별로 설립되었다. 각 지방 행정 기관마다 본부가 설치되어 이러한 분회를 통괄했다. 개설되지 않았던 입법원 대신, 분회 대표가 참집한 연합 협의회가 실질적으로 민의를 수렴하는 기관으로 기대되었다.

기관지로는, "공작 월보", "협화회지" 및 "협화 운동"이 존재했다. "공작 월보"는 1935년 12월부터 1936년 6월까지, "협화회지"는 1936년 7월부터 도중에 휴간되었으며, "협화 운동"은 1939년 9월 창간부터 1945년 4월까지가 확인되고 있다.

3. 발전 과정

협화회 회의


만주국은 건국 초기부터 일본 관동군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사실상 전체주의 체제로 운영되었다. 입법원은 거수기 역할에 그쳤으며, 푸이는 명목상으로는 강력한 권한을 가졌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괴뢰였다.

일당 독재 국가는 아니었지만 정치적 반대는 엄격히 처벌되었고, 공식적으로 허용된 유일한 정당은 협화회였다. 다만, 망명한 민족들은 각자의 조국을 위한 다양한 정치 단체 결성을 허용받았는데, 여기에는 파시즘을 지지하거나 로마노프 왕조 복원을 주장하는 백계 러시아 정당들과 유대인 난민을 위한 시온주의 운동도 포함되었다.

민족 협화의 이상을 홍보하는 만주국 기념 우표


협화회는 1940년 일본의 대정익찬회를 본떠 조직을 개편했다. 교사를 포함한 모든 정부 관리와 관료, 사회 주요 인사들이 회원으로 가입했고, 1937년부터는 16세에서 19세 사이의 모든 청소년이 자동 가입되었다. 1943년까지 협화회 회원 수는 만주국 인구의 약 10%에 달했다.

이론적으로 협화회는 관동군을 대체하여 만주국의 정치 권력을 장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관동군은 협화회 내 좌익 성향 인사들을 숙청하도록 명령했다. 이후 협화회는 정부 내에서 민족, 문화, 직업 대표 기능을 수행하기보다는 동원 및 감시를 확대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만주국의 선전 포스터


숙청 이후 협화회는 유럽의 "전체주의 정당"과 유사해졌다. 파시즘처럼 조합주의, 반공주의, 반자본주의 성향을 띠었으며, 계획 경제를 장려하고 직업 및 민족 공동체를 통해 계급 분열을 극복하고자 했다. 협화회는 몽골인, 만주족, 회교도, 한국인, 일본인, 백계 러시아 망명자뿐만 아니라 다수의 한족 등 아시아 공동체를 대표하는 특징을 보였다. 이러한 노력은 종종 몽골 라마, 만주 무당, 이슬람교 아홍, 불교 승려, 유교 도덕주의자 등 민족 종교 지도자들을 지원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만주 마을, 회족 모스크, 중국 공동체의 자체 감시 시스템(''보가'') 내에 협회 조직을 설립하여 지역 사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타치바나 시라키와 같은 일본 이데올로그들은 공화주의, 평등, 근대화의 목표와 공동체, 연대, 도덕 국가의 "동양"적 가치 사이에 모순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군대와 범아시아주의자들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인해 많은 긴장이 발생했고, 조화로운 사회보다는 양극화된 사회가 초래되었다. 몽골 청년들은 근대 교육과 라마의 권력 제거를 요구했고, 중국 지지자들은 황제 복원을 지지하는 군주주의자와 공화주의자로 나뉘었다. 이러한 긴장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독립적인 국가를 건설하기도 전에, 일본군은 만주국을 제2차 중일 전쟁에 투입하여 이 과정을 방해했다.

4. 이념

"협화회"라는 이름은 범아시아주의 운동이 장려한 "민족 협화"(民族協和, mínzú xiéhe)라는 개념에서 유래되었다. 만주국은 중앙 집권적 국가 구조 하에서 여러 민족 또는 국적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공동체적 권리와 제한된 자기 결정을 부여함으로써, 스스로를 소련의 "민족 연합"과 같은 형태의 국가로 제시하려 했다. 정치 이론가인 도미나가 타다시는 그의 저서 《만주의 민족》(Manshū no Minzoku)에서 민족 자결에 대한 소련의 정책에 관해 광범위하게 저술했다. 민족 협화 정책은 연방주의의 목표를 달성하고 소수 민족의 권리를 보호하는 동시에, 낡은 러시아 제국을 약화시켰던 분리주의를 피하기 위해 중앙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는 정책으로 홍보되었다.

만주국 협화회는 유일하고 영구적인 거국 일치의 실천 조직체로서 정부와 표리일체가 되어


  • 건국 정신을 앙양하고
  • 민족 협화를 실현하며
  • 국민 생활을 향상시키고
  • 선덕달정(宣德達情)을 철저히 하며
  • 국민 동원을 완성하여

이로써 건국 이상을 실현하고, 도의 세계를 창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5. 조직

만주국 협화회는 관제 조직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만주국 황제가 명예회장을 맡았고, 관동군 사령관이 명예고문을, 만주국 총리가 회장을 맡았다. 본부 이사 중에는 조선인으로는 관동군 장교 윤상필이 포함되었다. 최남선, 이범익, 이선근 등이 이 단체에 깊이 관여했으며, 박팔양도 중앙본부에서 재직하였다.

만주국협화회는 정부 조직에 대응하도록 중앙기구와 지방조직을 갖추었다. 의결기관인 지역 별로 연합협의회가 설치되었고, 최고 의결기관은 중앙연합협의회로서 국회와 같은 역할을 맡았다.

만주국은 건국 후 일본 관동군에 의해 전체주의 노선으로 사실상 운영되었다. 입법원은 주로 거수기 역할을 했으며, 총무청 국무원에서 발령한 칙령에 형식적으로 도장을 찍는 역할만 했다. 푸이는 공식적으로 막강한 권한을 위임받았지만, ''사실상'' 일본의 괴뢰 역할을 했다.

공식적으로 일당 독재 국가는 아니었지만, 정치적 반대는 엄격하게 처벌되었고, 공식적으로 허용된 유일한 정당은 협화회였다. 그러나 망명한 민족들은 주로 각자의 조국에 대한 다양한 의제를 홍보하기 위해 정치 단체를 결성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여기에는 백계 러시아 정당들이 포함되어 파시즘 또는 로마노프 왕조의 복원을 지지했고, 유대인 난민을 위한 여러 시온주의 운동도 포함되었다.

협화회의 구조는 1940년에 설립된 일본의 ''대정익찬회''를 모방하도록 개편되었다. 교사를 포함한 모든 정부 관리와 관료, 사회의 중요 인물들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1937년부터 16세에서 19세 사이의 모든 청소년은 자동으로 등록되었으며, 1943년까지 협화회 회원 수는 만주국 인구의 약 10%를 차지했다.

이론적으로 협화회는 궁극적으로 관동군을 만주국의 정치 권력으로 대체할 것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에 관동군은 협화회에 좌익 성향 혐의로 기존 지도부를 "숙청"하라고 명령했다. 따라서 협화회는 정부에서 민족, 문화 및 직업을 대표하는 기능을 제공하기보다는 동원 및 감시를 확대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숙청 이후 협화회는 유럽의 현대적인 "전체주의 정당"과 매우 유사해졌다. 파시즘과 마찬가지로 조합주의, 반공주의, 반자본주의적이었으며, 계획 경제를 장려하면서 직업 및 민족 공동체를 통해 사람들을 조직하여 계급 분열을 극복하려 했다. 협화회는 몽골인, 만주족, 회교도, 한국인, 일본인 및 백계 러시아 망명자뿐만 아니라 다수의 한족 등 아시아 공동체를 대표하는 데 특색을 보였다. 이러한 노력은 종종 이러한 민족들 사이의 종교 지도자들을 지원하는 것을 의미했다. 몽골 라마, 만주 무당, 이슬람교 아홍, 불교 승려, 유교 도덕주의자들이 그러했다. 만주 마을, 회족 모스크 및 중국 공동체의 자체 감시 시스템(''보가'') 내에 설립된 협회 조직의 활동으로 지역 사회에 대한 정권의 통제가 강화되었다.

타치바나 시라키와 같은 일본 이데올로그들은 공화주의, 평등, 근대화의 목표와 공동체, 연대, 도덕 국가의 "동양"적 가치 사이에 모순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군대와 범아시아주의자들이 추구한 매우 다른 프로그램과 이해관계로 인해 많은 긴장이 발생했으며, 조화로운 사회가 아닌 양극화된 사회가 초래되었다. 몽골 청년들은 근대 교육과 라마의 권력 제거를 요구했다. 중국 지지자들은 황제 복원을 지지하는 군주주의자와 이를 반대하는 공화주의자로 나뉘었다. 이러한 긴장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독립적인 국가를 창건하기도 전에 일본군은 만주국을 제2차 중일 전쟁에 투입하여 이 과정을 방해했다.

5. 1. 간부

만주국 협화회는 관제 조직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만주국 황제가 명예회장을 맡았고, 관동군 사령관이 명예고문을, 만주국 총리가 회장을 맡았다. 본부 이사 중에는 조선인으로는 관동군 장교 윤상필이 포함되었다. 최남선, 이범익, 이선근 등이 이 단체에 깊이 관여했으며, 박팔양도 중앙본부에서 재직하였다.

결성 당시 주요 간부는 다음과 같다.

  • 명예 총재: 아이신줴뤄 푸이
  • 명예 고문: 혼조 시게루
  • 회장: 정샤오쉬
  • 사무국장: 셰제스
  • 사무국 차장: 나카노 코이츠
  • 중앙 본부장: 하시모토 토라노스케
  • 명예 이사: 하시모토 토라노스케, 고마이 도쿠조, 이타가키 세이시로


이후 집정(후 황제)이 명예 총재(명예 회장)를, 국무원 총리(후 국무총리대신)가 회장을 겸임했다.

6. 활동

만주국협화회는 밀정 조직인 간도협조회를 흡수하여 항일 세력에 대한 귀순 공작 및 밀정 활동을 관장했다. 또한, 보갑제를 실시하여 전체 주민을 조직으로 묶어서, 치안에 대한 연대책임을 지웠다. 이로 인해 가족이나 이웃 사이에 고발이 횡행하게 되었다.

집단부락 건설도 주요 활동 중 하나였다. 오지의 작은 마을이나 단독 가옥을 철거시키고 주민들은 평야 지대로 강제 이주시켜 감시가 용이한 집단부락으로 재편성하는 사업이었다. 만주국협화회의 성립과 활동으로 인해 만주 지역의 항일 활동은 크게 위축되는 결과를 낳았다.

협화회의 구조는 1940년에 설립된 일본의 ''대정익찬회''를 모방하도록 개편되었다. 교사를 포함한 모든 정부 관리와 관료, 사회의 중요 인물들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1937년부터 16세에서 19세 사이의 모든 청소년은 자동으로 등록되었으며, 1943년까지 협화회 회원 수는 만주국 인구의 약 10%를 차지했다.

1930년대 중반, 관동군은 협화회에 좌익 성향 혐의로 기존 지도부를 "숙청"하라고 명령했다. 따라서 협화회는 정부에서 민족, 문화 및 직업을 대표하는 기능을 제공하기보다는 동원 및 감시를 확대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숙청 이후 협화회는 파시즘과 마찬가지로 조합주의, 반공주의, 반자본주의적이었으며, 계획 경제를 장려하면서 직업 및 민족 공동체를 통해 사람들을 조직하여 계급 분열을 극복하려 했다.

협화회는 몽골인, 만주족, 회교도, 한국인, 일본인 및 백계 러시아 망명자뿐만 아니라 다수의 한족 등 아시아 공동체를 대표하는 데 특색을 보였다. 이러한 노력은 종종 이러한 민족들 사이의 종교 지도자들을 지원하는 것을 의미했다. 몽골 라마, 만주 무당, 이슬람교 아홍, 불교 승려, 유교 도덕주의자들이 그러했다. 만주 마을, 회족 모스크 및 중국 공동체의 자체 감시 시스템(''보가'') 내에 설립된 협회 조직의 활동으로 지역 사회에 대한 정권의 통제가 강화되었다.

7. 해산

8. 평가

9. 관련 인물


  • 하시모토 도라노스케는 협화회 중앙본부장과 명예 이사를 역임했다.
  • 미야케 미쓰하루는 협화회 중앙본부장을 역임했다.
  • 아마카스 마사히코는 협화회 총무부장을 역임했다.
  • 후루미 다다유키는 협화회 지도부장을 역임했다.
  • 와다 쓰요시는 협화회 감사부장을 역임했다.
  • 후루이치 하루히코는 협화회 총무부장과 기획부장을 역임했다.
  • 이타가키 모리마사는 협화회 중앙본부 선전과 주임을 역임했다.
  • 쓰지 마사노부
  • 오자와 가이사쿠
  • 고즈카 미쓰히코
  • 무토 도미오는 협화회 중앙본부 선전과장을 역임했다.

참조

[1] 서적 Sovereignty and Authenticity: Manchukuo and the East Asian Modern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Inc 2004
[2] 서적 Glorify the Empire: Japanese Avant-Garde Propaganda in Manchukuo https://books.google[...] UBC Press 2013
[3] 웹사이트 満洲国の根本理念と協和会の本質 昭和11年9月18日 関東軍司令部調製 https://www.jacar.ar[...]
[4] 서적 近衛新体制: 大政翼賛会への道 1983
[5] 간행물 満洲国と協和会 中央公論 1940-12
[6] 문서 満洲国の根本理念と協和会の本質 関東軍司令部 1936-09
[7] 서적 実録満鉄調査部 朝日新聞社 1979
[8] 서적 超官僚
[9] 서적 わが半生 満州国皇帝の自伝 大安 1965
[10] 문서 国防論策
[11] 서적 満洲建国の歴史 満洲国協和会史 栄光出版社 1973
[12] 서적 甘粕大尉 中央公論社 1975
[13] 간행물 1940年代における満洲国統治の社会への浸透 アジア経済 1998
[14] 간행물 満州国協和会の政治的展開 日本政治学会年報 1972
[15] 간행물 満州国協和会史試論(一) 季刊現代史
[16] 서적 日本帝国主義の満洲支配 時潮社 1986
[17] 뉴스 満鮮日報 1941-11-07
[18] 서적 満洲国史各論 満洲国史編纂刊行会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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